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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의 uncanny valley

uncanny valley란, 일본의 로봇학자 모리 마사히로가 1970년에 발표한 그의 논문에서 소개한 현상이다. 로봇이 사람과 닮으면 닮을수록 사람들은 그 로봇에 더 호감을 느끼게 되는데, 닮은 정도가 어느 정도를 넘어 인간과 너무 유사해지면 급격히 호감도가 떨어지는 것을 말한다. uncanny valley를 번역하면 '불쾌한 골짜기'정도가 되는데, 인간과 닮은 정도를 가로축에 놓고 호감도를 세로축에 놓으면 인간과 완전히 닮은 100%지점의 바로 앞에서 호감도가 급감하는 골짜기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인간과 너무 유사한 로봇이나 모형을 봤을 때 급격한 혐오감을 느낀다.

 

그런데 나는 이런 uncanny valley현상이 '다른 사람을 돕는 행위'에서도 나타난다고 생각한다. 자기 자신과 부(富)의 수준이나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 능력의 차이가 크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도울 때는 자기가 마치 천사라도된냥, 기분좋게 '봉사'를 한다. 이런 기분좋은 봉사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은 주로 특정 시설(보호 시설, 요양원)이나 특정 지역(달동네), 혹은 특정 국가(아프리카의 대다수 국가, 남미나 아시아 지역의 빈국)에 몰려있다.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용어 자체가 이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처한 환경의 이미지를 표상한다.

 

그에 반해 충분히 자신의 경쟁 상대가 될 수 있는 사람들, 자기 주변의 사람들을 도울 때는 뭔가 켕기고 불편한 것을 느낀다. 아프리카 같은 곳에 가서 이른바 '장면 나오는'그런 봉사를 하다 온 사람은, 실제로 한 일에 비해서 과장되게 대단한 이타심을 가진것처럼 평가 받지만, 그런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교회라든지 어떤 집단에서 온갖 아귀다툼을 하며 주변사람을 몰락시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비난도 받지 않는다.

 

학업이나 직장생활을 생각해봐도, 경쟁상대의 곤란을 해결해주거나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같은 회사나 학교에 소속되어 있다 하더라도), 좋은 평가를 받기는 커녕 경쟁 사회의 원리를 몰각한 또라이로 취급되는 지름길이다. 도와준 사람도 도와준 행위에 계속 "괜한 일을 했구나."라는 찜찜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자신은 경쟁상대에게 도움을 받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기분 좋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절대로 자신을 이길 가능성이 없는', 그런 상대에게 한정된다.

 

물론 필요한 도움의 성격이나 정도가 두 경우에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그 본질이 다르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결국 지적하고 싶은 것은, '타인을 돕는 것'을 특정화시켜 사고하는 위선이다. 멀리있는 쓰레기장에 가서 깡통 몇 개나 끼적거렸으면서 성인흉내나 내다가, 정작 집 앞에 있는 쓰레기장은 냄새난다고 도망가는, 그런 쓰레기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by 피안선생 | 2008/09/20 17:35 | 피안선생의 사랑 | 트랙백 | 덧글(1)

오류의 표현도 자유, 그러나 오류

안재환씨의 안타까운 사망 기사를 읽다보면, 가끔 기분나쁜 리플과 마주치게 된다. "촛불이 안재환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주장인데, 정선희씨에 대한 마녀사냥은 나도 기분나빴으므로 그러려니 하려고 해도, 이러한 주장은 으레 "촛불시위는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결론으로 흐른다. 이에 대해서 반박할 말은 한 바가지지만, 기본적으로 이 주장은 발생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발생적 오류란 그 주장을 하게 된 경위나 그 주장을 하는 사람을 공격하여 그 주장 자체를 틀린 것이라고 결론짓는 오류다. 따라서 촛불시위에 참여한 사람 중 일부가 정선희씨를 마녀사냥한 게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 사람들이 시위에서 주장한 것이 틀렸다고 하는 건 발생적 오류 중 하나인 '인신공격의 오류'가 된다.

 

사실 이 오류는 언론의 전매특허라고 할 만큼 신문에서 널리 볼 수 있다. 예전에 기자실 통폐합 정책이 나와서 언론들이 발광하던 때도, 그들은 "언론 자유 침해야!" 라는 말만 반복하다가 지겨울땐 가끔발생적 오류를 범했다. 이를테면, "정부에 호의적인 학자 마저도 반대하고 있다."는 걸 반대의 근거로 삼기도 하는데, 아니, 정부에 호의적인 학자가 반대하는 거랑 뭔 상관? 그 반대의 논거가 중요한데 그건 제시되지 않는다. '권위로부터의 호소'는 일반적으로 올바른 논증이지만, 권위를 가진 사람이 자신의 이익과 결부된 주장을 할 때는 항상 주의해야 한다. 이 경우 그 교수는 언론편을 들면서 콩고물을 먹을 가능성도 있으므로, "아니, 교수도 반대해?"라는 것만으로 지지를 보내는 건 위험하다. 또 그 정책을 입안한 국회의원의 과거 행적을 들춘다든지, 오류를 범하는 방법도 가지각색이다.

 

아무리 찌라시라고 해도, 이러한 주장이 택도 없다는 걸 모르진 않을 거다. 아, 모를 수도... 여하간 인신공격이 끊이지 않는 건, 이게 대중에게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은 행정학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시민 사회의 성숙인데...

 

시민사회의 성숙은 표현의 자유를 지키는데도 중요하다. 찌라시들이 뻘소리를 한다고 해도 정부가 강제폐간(할리가 없지만)시키거나 검열을 할 순 없다. 이건 표현의 자유 침해다. 올바른 메커니즘은 일단 어떠한 주장이라도 할 수 있도록 허용하고, 수용하는 시민들의 비판과 무시로 매장되도록 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포리송이 "홀로코스트는 허구다."라고 주장했을때, 당시 유럽인들은 격노하여 그 책의 출판 중지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노암 촘스키가 포리송의 주장도 제시된 후에 논박될 것일 뿐이라며 포리송을 옹호한 것도 그런 이유이다.

by 피안선생 | 2008/09/20 15:20 | 피안선생의 사랑 | 트랙백 | 덧글(0)

경험자의 권위

농심에서 자사의 신제품, '뉴신라면'을 먹어 본 사람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다고 하자. 그런데 응답한 사람이 겨우 한 명이라면, 이 설문조사는 권위를 가질 수 있을까? 이 한 사람이 '맛있다' 라고 응답했다고 해서, 농심에서는 '좋아, 이 맛은 통하는 맛이야!'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당연히 이 설문조사의 결과는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 할 것이다. 단 한 명의 주관적 경험이, 실체적 진실과는 거리가 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것이 사적인 공간에서는 전혀 새로운 의미,심지어는 권위,를 획득하게 된다. 만약 이 '뉴신라면'을 먹은 사람이 친구와 편의점에 가서, "야, 뉴신라면 내가 먹어봤는데 존나 맛있더라."라고 한다면 이 정보는 라면을 막 사려고 하는 그 친구에게 놀라운 영향력을 발휘한다.

 

여기까지는 좋다. 다른 사람의 솔직한 주관적 경험을 듣는 것은, 시간과 신체가 유한하여 모든 걸 경험해 보지 못하는 인간에게 있어 앞으로 닥칠 새로운 사태를 판단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문제는 경험자가 권위적인 태도로 언동을 할 때이다. 마치 자신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서 실체적 진실을 획득한냥 말을 하는 경우다.

 

이러한 태도는 경험자가 한 경험이, (엄살이나 착각이 많지만)고난이나 고난의 극복과 관련된 것일 때 더 많이 나타나는 것 같다. 대표적인 예가 고3학생이 고2학생한테 말하는 '고3론', 대학생이 예비대학생에게 말하는 '대학론', 군필자가 군미필자에게 말하는 '군대론', 취직자가 비취직자에게 말하는 '사회론'이다. 내가 문제삼고 싶은 건 이런 주제를 '그냥'말하는 게 아니라, '권위적인'태도로 말하는 것이다.

 

이들의 소위 '권위적인 태도'가 불만인 점은, 용어는 권위적인 태도라고 붙였지만, 사실 태도가 '권위적이기'만 한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사태에 대한 스스로의 깊은 성찰 없이 이미 기존에 널리 퍼진 피상적 평가를 반복하며, 이러한 피상적 평가의 정당성을 입증하려 노력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피상적 평가는 아마도, 그들이 비경험자일때 또 다른 경험자들에 의해 사회화 된 것이리라.

 

이러한 태도가 왜 나쁘냐? 일단 비경험자의 의견 개진을 원천적으로 차단함으로써 생산적 대화를 막는다. 사실 경험했다고 그 사태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을 거저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적당한 예인지는 모르겠지만, 한국근현대사 전문가인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인들보다 한국을 직접적으로 많이 경험해 봤다고 할 수 없지만, 그보다 한국의 현대사회에 대해 잘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그가 한국의 근현대사에 대한 텍스트들을 많이 보고 깊이 연구했기 때문이다. 일본근현대사 전문가인 개번 맥코맥도 비슷한 예다.

 

이처럼 비경험자가 더 잘 알 수도 있다. 이러한 간접경험과 관찰의 힘을 무시하고 사태의 다면에 대한 담론을 허용하지 않는 것이 '경험자의 권위'가 갖는 가장 중요한 부정적 효과다.

 

몇몇 경험자들은 왜 때때로 이런 '권위적인 말하기'의 함정에 빠지는 것일까? 아까 소개한 '고3론', '대학론', '군대론', '사회론'에는 재밌는 공통점이 있는데, 비경험자에게 "니들은 몰라."식의, 해당 경험이 뭔가 아주 새로운 경험일 것 처럼 말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니들은 몰라."에 함축된 것은, "니들은 내가 겪은 고난을 몰라."와, "니들은 이 경험을 했을 때 알수 있는 인생의 성숙을 몰라."로 요약할 수 있다. (사실 그 성숙이 뭔지는 자기들도 모른다. 뭔가 성숙했다고 믿는다.)

 

이를 통해 그들이 '경험자의 권위'를 발산하는 심리적 상태의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그것은 청자가 아직 겪어보지 못한 경험을 해봤다는 데서 느끼는 우월감과 이를 바탕으로 비경험자를 무시하고자 하는 새디즘적 욕구, 그리고 고난의 경험을 과장함으로써 위로를 얻고자 하는 마조히즘적 욕구의 착종이라고 할 수 있다.

 

나 자신도 이런 함정에 많이 빠진다. 그런 후에 내 자신이 그런식으로 말했다는 걸 깨닫고 나면 엄청난 낭패감에 휩싸인다. 나는 그렇다고 쳐도, 아주 똑똑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도 이런 태도를 자주 취하는 걸 보면, 어쩌면 이건 듣는 비경험자 입장에서 '걸러듣기'의 지혜가 필요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by 피안선생 | 2008/09/20 15:18 | 피안선생의 사랑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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